미셸 초서도브스키 작가의 <전쟁의 세계화>를 읽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가치를 내세운 반면, 조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은 가치동맹을 새로운 구호로 내걸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 블록은 민주주의와 인권과 같은 가치를 중심으로 뭉쳐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 가치 동맹이라는 구호 이면에는 자신들과 적대하고 있는 진영, 특히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등은 그와 반대되는 독재, 전체주의, 팽창주의적 야욕 집단이라는 논리가 깔려있습니다.
원래 반증/혐증 정서가 강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최근에는 반러 정서도 강해진 한국 사회에서도 이 같은 이분법적인 논리가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이든의 가치 동맹 운운은 논리로 보나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보내 속 빈 강정 같은 이야기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선 국제정치란 단순한 선과 악의 이분법만으로 접근할 수 없으며 그러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바이든의 논리는 철저하게 자심들의 편은 선이고, 반대편은 악이라는 이분법을 깔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역사와 대외정책을 면면히 살펴보면 미국이 세계 민주주의의 보호를 자처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정치적 수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역대 미국 행정부는 자신들의 이해에 맞는 외국 정권은 아무리 악랄한 독재 정권이라 하더라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왔으며, 자신들의 이해에 반하거나 자신들의 위상에 도전한다 싶은 정권은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약화시키거나 심지어 전복시키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바이든의 논리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사이의 패권 다툼에서 우위를 정하기 위한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수사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국제 정치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 주류 미디어에서 보도되는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말들의 이면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제도권 정치인들의 선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주체적인 자세도 필요합니다. 한국의 주류 미디어는 국제정치를 다룰 때 대체로 서방 세계의 주류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면 이러한 편향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미셸 초서도브스키의 전쟁의 세계화는 그러한 면에서 우리에게 여러 중요한 것들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본 리포트에서는 전쟁의 세계화의 주요 논점들을 비평적으로 분석하고 비판점과 한계도 살펴볼 것입니다.
초서도브스키가 전달하는 논점들은 우리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현대 한국 사회는 대체로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친서방적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외국 문화 콘텐츠나 학문적 담론들도 서방세계나 같은 친서방 블록 대표적으로 일본의 주류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에 반해 그 반대편 진영에 속한 사회의 목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선별적으로만 전달되어왔습니다. 이는 국내 정치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패권주의적 행보나 한반도에 대한 영향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때마다 친북, 친중이라는 딱지가 따라옵니다. 이러한 현상은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바람직하고 건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실 상기한 사항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서방 세계 및 서방 블록 전반에 상당 부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냉전 때 그러했듯이 상대방 진영의 나라들을 악마화하거나 적대시하는 데에 여념이 없습니다.
과거의 소련, 공산주의자라는 대상이 러시아, 중국, 이슬람주의자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초서도브스키는 이러한 현실에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 정보가 인권, 민주주의와 같은 키워드를 써 왔지만 세계 여러곳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파괴해 왔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냉전 종식 후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팔레스타인, 예멘, 리비아 등지에서 일어난 인권 침해, 학살에는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미국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초서도브스키는 이를 긴 전쟁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디어에서 보도되는 현지의 낙후되고 비민주적인 사회에 대한 표면적인 이미지만을 전달받을 뿐입니다. 왜 해당 사회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사회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없어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의 일방적인 관점이 우선적으로 보도되어 왔습니다. 몇 년 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예멘 난민 수용 문제를 둘러싼 논쟁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멘에서 왜 난민이 발생했고, 돌고 돌아 왜 한국 땅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한 고찰 없이 그들을 광신, 비민주, 반인권과 같은 키워드들을 먼저 연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서를 달자면, 나는 기본적으로는 한국 사회가 예멘 난민들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난민들에 대해서 보다 포용적이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지만, 동시에 나이브하고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편입니다. 마냥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수용하고 이를 위해 어떤 사회적 장치를 세워둘 것인가에 대해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상당수 한국 시민들이 이슬람권에 대한 공포 정서에 휩쓸린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이러한 이슬람 공포 정서가 막연한 제노포비아보다는 서구 중심주의에서 상당 부분 유래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그 반대편에 있는 이슬람권, 중국, 러시아 블록은 타파해야 할 전체주의, 독재의 대표처럼 인식됩니다.
물론 친서방 블록에 속하지 않은 비서구 지역 상당수가 서방 세계 및 한국, 일본, 대만 등에 비해 민주주의가 크게 발달하지 못하거나 권위주의, 독재, 인권탄압 등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국제정치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나 현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이미지와 현상 이면의 것을 볼 수 있어야 현재 국제사회의 여러 문제들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쟁의 세계화>에서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듯이 이슬람권의 여러 문제들, 이를테면 종파 간 갈등, 내전, 독재, 여성차별 같은 문제는 이슬람권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서방 강대국들의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역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를 단순히 문명의 충돌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렇게 칭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가령 사우디아라비아는 최근까지도 여성의 운전을 허가하지 않았을 만큼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제해 온 국가입니다. 그리고 입헌 군주제도 아닌 전제군주제로서 내부의 민주주의 운동가들과 인권 운동가들을 극심하게 탄압해 왔으며, 사우디아라비아 내 종교적 소수자들인 시아파 무슬림, 기독교인들을 박해해 왔습니다.
그리고 중동 지역의 패권으로서 주변국들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주권을 침해해 왔습니다. 예멘에서 내전이 발발하고 난민들이 발생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책임이 큽니다. 또 사우디아라비아는 근대적 수니파 이슬람 원리주의 사상인 와하비즘을 국시로 하면서 사실상 수니파 이슬람 원리주의의 총본산이 된 곳입니다. 수니파 이슬람 출신의 테러리스트들이 다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국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우드 왕가를 어느 국가가 가장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후원해 왔을까요? 다름 아닌 미국입니다. 역대 미국 행정부는 알 사우드 왕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면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사우디아라비아를 중동 지역의 사냥개로 삼아왔습니다.
냉전 시대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보수적 무슬림 부르주아지들과 민중들의 정서를 이용해 소련을 견제했습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당시 미국 백악관 국가 안보 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드디어 소련에게도 베트남을 선사할 때가 왔다! 두말할 나위 없이 냉전 후기 미국 수뇌부들에게 있어 베트남은 쓰라린 기억입니다. 세계 각지에 미국의 패권을 확장시켜 왔던 과정에서 가장 충격적인 실패를 맞이했던 곳이 베트남이었기 때문입니다.
통킹만 사건을 기점으로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비단 베트남에서 뿐 아니라 자신들의 동맹 블록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심지어 미국 국내에서 조차 격렬한 반발과 저항에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패권주의를 좌절시킨 것은 호찌민과 보응우웬잡, 베트콩과 베트남 민중들이었지만 동시에 세계 각지에서 국경을 초월하여 일어난 반전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브레진스키의 베트남 언급은 미국 행정부 인사들의 세계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이기도 합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한 나라의 주권이 짓밟히고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미국 정부 인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소련과의 패권 경쟁이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해 소련과 맞설 이슬람 전사들을 대거 끌어모았고 그중에서는 훗날 모든 미국인들의 공적이 되는 오사마 빈 라덴도 있었습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이 같은 전략은 효과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고 미국의 이처럼 무모한 패권 추구로 인해 훗날 이슬람권은 물론이고 자국민까지 불안에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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